한국의 쌀 생산
- Jpark Garden
- 2020년 8월 11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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최종 수정일: 2020년 9월 19일
한국의 쌀 생산
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%씩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쌀 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 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. 당시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나빴다. 박정희 정부는 쌀 증산을 위해 통일미를 개발해 보급했고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쌀 자급에 성공했다. 수확량은 3,621만석이었다.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,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키워드와 다름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.

이후로도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쌀 생산량이 4천만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. 쌀 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은 이 해 12월 4천만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으며, 농촌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쌀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, '녹색혁명 성취'라는 휘호를 남겼다. 정부는 “녹색혁명 성취”를 선언하고,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. 쌀이 남아돌자 박 대통령은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.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.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나 혼식/분식 장려 운동, 무미일,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고,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.

통일벼는 냉해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는데, 1980년 최악의 냉해로 통일벼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. 1980년은 쌀 생산량이 30% 감소한 최악의 흉년이었다. 1981년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었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1980년대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. 쌀 농사는 1977년 풍년 이후 1980년에는 냉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자 쌀이 남아돌아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다.

한국의 쌀 생산량은 1988년을 정점으로 꾸준히 감소 중이다. 2017년에는 쌀 생산량이 최악의 흉년이었던 1980년보다 적어져 통일벼 개발 이전인 1960년대 수준으로 감소했다. 벼 재배 면적도 1987년을 정점으로 꾸준히 감소 중인데, 2018년 73만 8천 헥타르로 2017년 75만 5천 헥타르보다 2.2% 줄어들었다. 벼 재배 면적 감소율은 지난해(-3.1%)와 최근 5년 평균(-2.3%)보다 낮은 수준으로, 지난해 쌀 가격 상승세와 함께 기상 악화로 인해 다른 작물로의 전환이 여의치 못해 벼 재배로 돌아온 농가가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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